사진 그리고 여행 | 유네스코 지정 세계 문화유산 탐방 ④ 포르투칼 신트라

깊은 산 속 에덴의 동산, 신트라 Sintra

윤창호 / 여행작가(사진 · 글)

영국의 시인 바이런은 신트라를 일컬어 '에덴의 동산'이라고 칭송했다. 깊은 산 속 우거진 숲 속에 한 폭의 그림처럼 고즈넉하게 자리잡은 이 작은 마을의 풍경이 너무나 평화롭고 아름다웠기 때문일 것이다. 리스본의 로시우 역에서 사십여 분을 달려서 처음 신트라 역에 내렸을 때만 해도 주변에 보이는 것은 그저 아담한 주택가와 교회뿐이어서 다소 실망스런 표정을 감추지 못했는데, 큰 길을 따라서 길모퉁이를 조금 돌아가자 이내 눈앞에 불쑥 솟아오른 새하얀 두개의 탑에 탄성을 자아냈다. 그 어느 왕궁에서도 본적이 없는 전혀 다른 건축 미학을 지니고 있다. 주변에는 길을 걷던 사람들이 하나같이 멈춰 서서 연신 카메라 셔터를 눌러댄다.

도로가 말끔하게 포장이 되긴 했지만 신트라 왕궁과 마을들을 오가는 마차들의 말발굽 소리가 수백 미터 떨어진 곳에서도 또렷하게 들릴 정도로 왕궁으로 가는 숲길은 고요하기만 하다. 지난 밤 파두 레스토랑에서 밤늦게까지 혼자 앉아서 어둡고 우수에 젖은 파두를 들었던 탓에 다소 가라앉아있던 기분이 하늘을 가릴 정도로 짙게 우거진 숲 속을 걷다보니 금새 상쾌해진다.

포르투칼에서 며칠동안 머물면서 느낀 것이지만, 이 나라만큼 서로 대비되는 이미지가 하나의 정서 속에서 공존하는 나라도 드물다는 생각이 들었다. 파두를 듣고 있으면 우리네의 恨을 닮은, 왠지 어두운 정서가 느껴지기도 하고, 포르투칼 대항해 시대의 편린들을 접하고 보면 그야말로 정복자의 강인함이 불쑥 느껴지곤 하는 것이었다. 그렇듯 불가해하면서도 친근감이 가는 바로 그런 나라이다.

신트라 왕궁에 가까워지면서 왕궁 주변은 지금까지의 고요와는 달리 세계 각국에서 모여든 관광객들과 거리를 가득 메운 레스토랑, 선물가게 등으로 북적인다. 14세기부터 1910년에 공화제가 출범할 때까지 국왕의 여름 별장으로 이용되었던 왕궁은 특이한 두개의 탑도 탑이지만, 아줄레주Azulejo로 불리는 포르투칼의 전통 타일 예술의 진수를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도 사람들의 흥미를 끄는 곳이다. 원래 아랍의 장식 예술이었던 아줄레주가 포르투칼에 들어오게 된 것은 16세기에 스페인 그라나다의 타일 예술에 감명을 받은 마뉴엘 1세가 이곳 신트라의 왕궁을 타일로 장식하면서 부터이다. 그래서 이곳에는 포르투칼 최초의 아줄레주 장식이 남아있다. 왕궁은 14~17세기에 걸쳐서 수 차례의 증개축을 하게 되었는데 마뉴엘 1세가 증축한 부분은 16세기 대항해 시대의 포르투칼의 영화를 보여준다. 그 중에서도 특히 온통 아줄레주로 뒤덮인 아랍실Sala dos Arabes과 천장에 그려진 27마리의 백조로 유명한 백조실Sala dos Cisnes, 사냥모습을 그린 바로크 양식의 아줄레주로 둘러싸인 문장실Sala dos Brasoes 등이 볼 만하다.

왕궁 내부를 둘러보고 잠시 입구의 계단에 앉아서 쉬고 있을 때 문득 혼자서 열심히 여행 안내서를 뒤적이는 여학생이 눈에 띄었다. 어디선가 눈에 익은 듯한 생각이 들어 자세히 얼굴을 보니 이틀 전 리스본의 바이루 알투 거리에서 호텔을 찾지 못해 서성거리던 내게 다가와서 호텔의 위치와 가격까지 자세히 알려주던 루마니아 출신 독일 여학생이 틀림없었다. 내가 다가가서 어깨를 툭 치자 그녀도 금방 알아보고 무척이나 반가워한다. 함께 기념사진을 찍고 근처 노천카페에서 콜라 한잔씩을 마신 뒤 그녀는 페나성을 포기하고 바닷가로 간다며 배낭을 메고 총총이 사라졌다. 신트라는 리스본에서 가깝기 때문인지 포르투칼을 여행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번은 들렀다 가는 곳이라던 말이 새삼 실감이 났다.

왕궁에서 페나성으로 가는 길은 꼬불꼬불한 산길을 한참을 걸어 올라가야 한다. 그래서 보통은 두 곳을 오가는 소형 셔틀버스를 이용한다. 성으로 오르는 골목길이 워낙 좁아서 중간중간 멈춰 서서 지나치는 차를 기다려야만 했다. 버스 차창 밖으로 보이는 건 짙게 우거진 녹음뿐이다. 성의 입구에서도 페나성까지는 다시 족히 15분은 가파른 언덕길을 걸어 올라가야만 한다. 숨이 턱에까지 차오르도록 어렵사리 성에 오르자 우선 탁 트인 사방의 풍경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짙푸른 하늘과 광활한 평원이 발 아래로 펼쳐지고 때때로 산새들의 울음소리가 들려온다. 한참을 그대로 난간에 걸터앉아 있으려니 절로 심호흡을 하게 된다.

독일에 있는 그 유명한 노이슈반슈타인 성을 세운 루드비히 2세의 사촌인 포르투칼의 페르디난도 2세가 바로 이 페나성을 세웠다. 페르디난도 2세는 1836년에 포르투칼의 여왕 마리아 2세와 결혼하기 위해 포르투칼로 오게 되었는데, 그는 예술적 감각이 탁월했던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그래서 그에게는 'Artist king'이라는 별칭이 따라 다니기도 한다. 그는 포르투칼에 온 뒤 리스본에서 가까운 신트라를 찾았다가 빼어난 자연 경관에 매료되어 이곳에 아름다운 성을 짓기로 하고 이를 실행에 옮긴 것이었다. 이슬람, 르네상스, 마누엘, 고딕 양식의 집합체인 페나성은 건축학적으로는 비정상적이고 파격적이라는 평가를 받음과 동시에 19세기 낭만주의 예술 사조의 대표적인 건축물로 평가받고 있다. 그래서 성 안을 걷다보면 화려한 색채와 얽매임 없는 형태들은 왠지 동화적이고 몽상적인 분위기가 물씬 풍긴다. 낭만주의의 자유분방함 그 자체다.

성의 내부는 궁성으로서는 그리 크지 않은 편이다. 그러나 아기자기하고 화사한 색채로 꾸며진 각각의 방들은 공간을 최대한 활용하는 지혜를 보여준다. 아멜리아 여왕의 방Quarto da rainha Amelia나, 터키인의 살롱Salao dos turcos 등의 방들은 이곳을 찾는 이들에게 인기가 있는 곳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페나성의 매력은 해발 500미터 산 정상에서 바라보는 시원스런 전망에 있다. 날씨가 맑은 날에는 저 멀리 테주강과 리스본, 그리고 대서양이 아득히 시야에 들어온다. 주변의 모든 곳들을 내려다볼 수 있는 전망대인 셈이다.

신트라 왕궁 주변과 시내에서 페나성까지 오르는 약 3킬로미터에 이르는 숲길은 시립 공원으로 지정되어 있어서 한적한 산책과 삼림욕을 즐기려는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곳이다. 페나성에서 내려온 사람들은 삼삼오오 레스토랑으로 몰려간다. 구운 소세지와 더불어 포르투칼이 자랑하는 고급 와인인 포르투 와인을 마시며 얘기꽃을 피운다. 바이런의 말대로 이곳은 각박한 세상을 살아가는 리스본 시민들은 물론 세계 각국에서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마음의 평화와 휴식을 제공해주는 에덴의 동산임에 틀림이 없는 듯 하다. 하늘과 숲과 몰려왔다가 흩어지는 구름들을 바라보며 동화 속의 세상을 몽상해볼 수 있는 곳이 바로 신트라 숲 속의 궁전이다.